타에코의 낯선 여행기
조용한 남쪽 바닷가 섬마을을 찾은 타에코(고바야시 사토미)는 아무의 방해 없이 휴가를 보내고 싶어 한다.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 이 섬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휴대폰이 터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민박집에 도착한 타에코는 주인 유지(마츠이시 켄)을 만난다. 방으로 옮겨주겠다던 짐을 덩그러니 내려놓고 밖을 나선 유지의 모습에 타에코는 당황하고 만다. 첫인상부터 이상한 이곳은 조금 특별하고 이상한 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여름이 되면 이 섬에서 빙수를 파는 사쿠라(모타이 마사코), 학교 선생님 하루나(이치카와 미카코), 손님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유지까지 이 셋과 며칠 동안 함께 지내야 하는 타에코는 앞이 막막하기만 하다. 관광과는 거리가 먼 이 마을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사색'하는 것뿐이다. 이른 아침 모두가 바닷가에 모여 '메르시 체조'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늦잠을 자고 싶은 타에코만 빼고 말이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음이 쉬어가고플 때면 바닷가에 있는 빙수가게에서 빙수를 먹으며 멍을 때린다. 비용은 물물교환이다. 돈이 아닌 서로가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으로 마음을 전한다. 좋은 음식재료가 생기면 함께 나눠먹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웠던 타에코는 결국 다른 민박집으로 몸을 옮긴다. 잔잔한 마을의 풍경이 부담스러웠던 타에코였지만, 그녀는 다른 민박집으로 가자마자 다시 돌아온다. '일한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원칙 아래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에 질렸기 때문이다. 사쿠라의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오기 위해 타에코는 자신의 캐리어를 버린다. 다시 유지의 민박집에 돌아온 그녀는 조금씩 사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서 벗어나 그냥 생각나는 것을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시선을 맞추며 그녀는 조금씩 평온함을 느낀다.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
영화에서는 타에코가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마을로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영화 후반에 타에코의 제자 요모기가 등장함으로써 그녀가 선생님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유지의 민박집에는 '코지'라는 강아지가 있다."코지는 중요한 것을 늘 챙겨두는 버릇이 있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 잊는다"라고 유지는 말한다. 내가 필요한 것들을 쫓아 살다 보면 우리가 왜 그것을 필요로 했는지 잊는 순간들이 있다. 여행을 떠나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내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이리 바쁘게 살아왔는지 잠시 인생의 엑셀 대신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순간이 필요하다. 타에코는 지루한 민박집 생활을 힘들어했지만, 그녀가 다른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이유 없는 열심'에 놀라고 만다. 무엇을 더 일구어야 하고, 열심 내어야 하고, 열심을 강요받는 것이 긍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타에코는 깨닫게 된 것이다.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곳을 찾으면서 그녀는 캐리어 가득 무언가를 챙겨 왔다. 영화 속에서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우리는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책 한 권, 여분의 옷과 생필품 등이 들어있을게 뻔하다.그녀는 캐리어를 버렸을 때 비로소 여행의 맛을 알게 된다.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절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행에서조차 무언가를 해야 하고, '쉼'이라는 단어 아래 일상에서 해치우지 못했던 부산물들을 챙겨 여행지로 떠난다. 그리고 일상의 연장선인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깊은 안도를 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단순히 더 좋고 새로운 것을 만나기 위함도 있지만, 서두르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고 인정하고 위로하기 위함이다. 여행을 떠나면 알 수 있다. 내가 중요하다 여겨 놓지 못했던 일들이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것 일수도 있고, 부족하다 여겼던 내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 것이었는지 말이다.
내가 쓰고 있는 안경은 무엇일까?
영화 내내 타에코는 안경을 쓰고 있다. 바닷가에서 바람을 맞으며 사색할 때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렇다. 그녀가 안경을 쓰지 않고 있던 때는 잠을 잘 때뿐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안경부터 썼으니 말이다. 집으로 돌아가던 차에서 바람을 느끼던 타에코는 불쑥 불어온 바람에 안경을 잃어버리고 만다. '아- '라는 짧은 탄식만 남긴 채 그녀는 안경을 찾기 위해 차를 세우지 않는다. 그저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뿌옇게 보일 세상을 바라보며 사색한다. 영화에서 안경은 단순히 잘 보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 안경은 정확하게 보고 행동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영화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기준, 방향, 고정관념, 두려움 등을 모두 안경에 투영시킨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든 이미 내가 착용하고 있는 안경(생각, 사고, 고정관념 등)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된다. 다른 이들의 안경도 써보아야 한다. 때로는 안경을 벗어놓고 뿌옇게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때때로 정확하게 보는 게 꼭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지럽거나 조금은 뿌연 세상에서 낯선 아름다움을 맞이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안경은 필요의 도구이지, 정답이 아니다. 삶의 방식도 마찬가지다. 나의 생각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그 순간의 감정에 맞춰 행동하다 보면 어느새 새로운 나와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루함이 매력인 영화 안경은 모두에게 고요속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전달하고 있다.
'영화를 말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모메식당, 잔잔한 일본영화 (0) | 2022.02.28 |
---|---|
웰컴투동막골, 오래된 미래를 그리다 (0) | 2022.02.27 |
원더, 세상은 모두가 변할 때 아름다워진다. (0) | 2022.02.23 |
관상, 조선시대의 왕권쟁탈전 (0) | 2022.02.21 |
비긴어게인, 음악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0) | 2022.02.21 |